화지구곡(花枝九曲)
화지구곡(花枝九曲) 일명 신북구곡(身北九曲) 원림(園林)은 옥소(玉所) 권섭(權燮1671-1759)이 경영했던 구곡원림이다. 권섭이 중시조인 삼한공신태사(三韓功臣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다.
권섭이 문경군(聞慶郡) 신북면(身北面) 화지동(花枝洞)(현 문경시 문경읍 당포 리)에 거주하며 화지구곡 원림을 경영하였다. 권섭은 25세에 첫 부인인 이씨 부 인이 별세하자 중종의 4대손인 중의대부 대원군 광윤의 따님을 재취로 맞으려고 했으나 친명(親命)을 얻지 못하여 부실(副室)로 60년을 함께 생활하였다.
이씨 부인이 주로 문경군 화지동에 살았으므로 권섭은 만년에 청풍(淸風)과 70여 리 떨어진 화지동을 오고가며 화지구곡 원림을 경영하게 되었고 또한 이를 대상 으로 「화지구곡시(花枝九曲詩)」를 지었다. 화지구곡 원림은 신북천(身北川)과 초곡천(草谷川)이 합류하여 영강(潁江)으로 흘러드는 마원(馬院)에서 시작하여 신북 천 상류인 하늘재[大院]에 이르는 아홉 굽이로 이루어졌다. 권섭은 자신이 경영 한 구곡원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사람이 거처하는 곳을 구곡(九曲)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옛 사람이 그 굽이의 수를 아홉으로 정한 것은 모두 형상을 취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후인들은 단지 모방하고 따를 뿐이다. 지금 나의 화지동 별장도 구곡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니 이 또한 웃음을 살만하다. 그러나 이미 이름을 지었으니 일단 차례대로 논하여 글을 짓는다.
必人居之稱九曲其來久矣古人以九數其曲皆有取象之義而後人則只依倣而爲例耳今我花枝之莊亦以九曲名之又可笑旣名之矣且論次而文之
권섭(權燮)은 사람들이 거처하는 공간을 구곡(九曲)이라 이름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자(朱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설정한 지가 오래되니 구곡원림을 경영하는 전통이 짧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구곡원림을 경영하며 그 옛날 주자가 무이구곡에서 취하려 했던 뜻을 계승하지 않고 단지 그 형상만을 모방할 뿐이라고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권섭이 말하는 주자가 무이구곡에서 취하려 했던 뜻은 무이구곡의 산수를 단순히 아름다운 경관으로만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이에서 나아가 도가 내재하는 공간으로 인식하였다는 의미이다. 주자가 무이구곡을 경영한 이후, 조선에서 구곡원림을 경영하는 유자들이 많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구곡원림을 제외해도 수십 곳이 된다. 이렇게 구곡원림을 경영하는 유자들이 구곡원림을 경영하는 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 형식만 모방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권섭이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을 경영하며 염려를 한 것도 이 점이다. 단지 구곡원림의 형식만을 모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하는 것이 권섭의 걱정이었다.
知是斯區有地靈 이 구역에 땅의 신령이 있음을 알겠으니
溪流九曲此澄淸 계곡물 아홉 굽이 이렇게 맑고 깨끗하네
幽深洞裡昭明界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에 밝고 환한 세계 있어
到處名村自舊聲 곳곳마다 이름난 마을 옛날부터 명성 높았네
권섭(權燮)은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의 땅이 신령함이있어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아홉 굽이를 흐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진 화지구곡 원림은 밝고 환한 경계를 이루어 곳곳마다 이름난 마을이 예전부터 명성이 높다고 하였다. 권섭은 화지구곡원림의 땅이 신령하다 전제하여 이 아홉 굽이가 특별한 지역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신령한 공간이라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한지라 이 공간에 깃들어 자리한 마을들이 명성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권섭은 화지구곡 원림의 아홉 굽이를 대체로 이 공간에 깃들어 자리한 마을을 중심으로 설정하였다. 화지 구곡원림의 제1곡은 마포(馬浦), 제2곡은 성교(聲校), 제3곡은 광수원(廣水院), 제4곡은 고요성(古要城), 제5곡은 화지동(花枝洞), 제6곡은 산문계(山門溪), 제7곡은 갈평(葛坪), 제8곡은 관음원(觀音院), 제9곡은 대원(大院)이다. 화지구곡에서 제6곡인 산문계와 제9곡인 대원을 제외한 모든 굽이가 마을이 깃들어 자리한 공간이다.
제1곡 마포(馬浦)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의 제1곡은 마원(馬院)이다. 마포는 신북천과 초곡천이 합류하여 넓은 시내를 형성하는 굽이에 자리한다. 마포는 행정구역상으로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馬院里)이다. 시내가 마원 들을 둘러 흘러가고 시내 양편으로 마원 마을이 자리하는 굽이이다 이 굽이의 특징은 확 트인 지형이다. 저 멀리 높은 산이 솟았지만 문 문에서 보기가 어려운 넓은 들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마원 들을 둘러 흘러가는 시내도 그 폭이 넓어 옛날에는 많은 물이 흘렀던 것으로 추 증된다. 그러나 지금은 수량이 많이 줄어 평소에는 배를 띄울 수 없는 하천이 되었다. 넓은 들판과 시내가 어우러져 한 굽이를 형성하는 이곳을 권섭은 화지구곡 원림의 제1곡으로 설정하였다.
마원(馬院)은 조선시대 문경현 신남면(身南面) 마포원리(馬砲院里)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우어리(牛於里) 일부를 병합하여 문경면에 편입되어 마원리(馬院里)가 되었다. 고려 때부터 교통의 요지로 항상 말을 많이 길러 왕래하는 길손들에게 제공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문경현의 군졸들이 말을 타고 총을 쏘며 훈련을했다 하여 마포원(馬砲院)이라 하고 마원, 마판(馬板)이라 했다. 이 마을은 마성면과 접하고 있는 문경읍 최남단의 마을로 문경읍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화지구곡 원림 제1곡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3′22.81″ ∙경도 : 128° 07′00.97″ ∙고도 : 173.2m
권섭(權燮)은 이곳에 이르러 전개되는 경치를 바라보고 제1곡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일곡은 마포원(馬浦院)이다. 물이 잔잔하고 넓어서 배를 띄울 만한데 배는 없다. 두 다리가 가로 놓여 있고 큰 길이 숫돌같이 평탄하다. 관청의 누각에 기대어 내려다보면 밤나무 숲이 마을을 가리고 푸른 안개가 들판을 감싸고 있는데 맑고 탁 트인 것이 마치 강호의 경치 같다.
其曰一曲爲馬浦院者其水平闊似泛舟而無舟雙橋橫架大道如砥倚官樓而俯視之栗林隱村翠煙籠野澄曠如江湖景色
권섭이 화지구곡 원림을 경영하고 있을 때는 이 마포(馬浦)의 넓은 시내에는 물이 많이 흘러 배를 띄울 만하였다. 지금처럼 수량이 많지 않아 배를 띄울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증된다. 시내에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물이 흐르고 주위의 경관이 확트이어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마포에는 관청의 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마원의 넓은 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관청의 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권섭은 이 누각에 올라가 밤나무 숲이 마을을 가리고 들판에 푸른 안개가 덮여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띄울 배는 없었지만 권섭은 마음으로 배를 타고 여기서부터 화지구곡 원림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하였다. 화지구곡의 굽이마다 자리하는 이름 있는 마을을 유람하기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배를 저어 나갔다.
一曲何無泛釣船 일곡이라 어찌하여 고깃배 띄움이 없겠는가
中間澄闊似江川 중간이 맑고 넓어 강이나 내와 같은데
官居坐倚晨昏閣 관아의 신혼각에 기대 앉아 있노라니
野色村光靄靄烟 들판과 마을 모습이 안개 속에 아련하네
권섭은 화지구곡 원림의 제1곡에서 고깃배를 띄웠다. 시내가 강과 같이 넓어 고깃배를 띄울 수 있는 굽이었다. 그러나 권섭은 배를 띄울 수 없었다. 이 굽이에 도착해 보니 넓은 시내는 배를 띄울 수 있었지만 배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마음으로 배를 띄워 나간 것이다. 권섭이 고깃배를 띄운 것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고깃배를 타고 어부가 되었지만 실제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산수를 유람하는 가어옹(假漁翁)이었다. 그러기에 권섭은관청의 신혼각(晨昏閣)에 기대앉아 안개 속에 덮인 들판과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가롭게 제1곡에 펼쳐진 경관을 감상하였다. 여기에서 삶에 지친 권섭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제2곡 성교(聲校)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의 제2곡은 성교(聲校)이다. 제1곡인 마포(馬浦)에서 길을 따라 2㎞정도 가면 문경시 문경읍 교촌리(校村里)에 이른다. 문경고등학교 뒤편으로 난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높다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건축물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문경 향교(聞慶鄕校)이다. 화지구곡 제2곡인 성교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3′32.96 ″∙경도 : 128° 06′49.24″ ∙고도 : 243.2m
문경향교는 1392년(태조 1) 성현(聖賢)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년대 이후에 중건하였는데 1990년 명륜당 중수 시에 나온 상량문(上樑文)에는 1620년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중건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전사청(典祀廳), 내삼문(內三門), 명륜당, 동재(東齋),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는데 대성전에는 주(周)나라의 5성(聖)인 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史), 맹자(孟子)와 송(宋)나라 4현인 주돈이(周敦伊), 정호(程顥), 정이(程伊), 주자(朱子)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賢)이 모셔져 있다. 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었고 그 안에 조선 숙종(肅宗)의 어필(御筆) 병풍(屛風)이 있다. 문경향교는 주흘산(主吃山)에 정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경사면에 입지한 관계로 그 배치가 상묘하당(上廟下堂)의 형태로 되어 있다.
화지구곡 원림의 제2곡을 성교(聲校)로 지정한 것은 의미가 있다. 권섭(權燮)은 「화지구곡시(花枝九曲詩)」서시에서 화지구곡에는 명성 있는 마을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다. 제1곡인 마포(馬浦)에서 출발하여 처음으로 도착한, 명성 있는 마을이 성교이다. 이 마을이 명성을 가지게 된 것은 향교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향교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학문에 들어가는 이들이 공부하는 공간이다. 그 학문은 유가의 학문이며 유가의 도를 지향한다. 화지구곡 원림을 유가의 공간으로 설정한 권섭에게 향교가 자리한 성교는 매우 중요한 마을이 아닐 수 없다. 이 성교에 대하여 권섭은 다 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곡은 향교촌(鄕校村)이다. 주흘산이 뒤쪽에서 진산으로 솟아 있으며 하늘을 가로지른 밝고 흰 모습이 금강산이나 설악산과 같다. 그 아래 널찍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는 향교는 옛 성인을 봉안하여 윤리를 밝히며 모범이 되는 곳이다.
其曰二曲爲鄕校村主屹山鎭後橫天皓白如金剛雪岳其下廣貌屹然奉先聖於其中爲明倫首善之所
권섭(權燮)이 성교(聲校)를 화지구곡의 한 굽이로 설정한 까닭은 옛 성인을 봉안하여 윤리를 밝히며 모범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학자인 권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유가의 사상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유가의 사상은 성현이 밝혀 놓은 사상이라 그들을 봉안하여 숭앙하는 일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주(周)나라의 5성(聖)인 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史), 맹자(孟子)와 송(宋)나라 4현인 주돈이(周敦伊), 정호(程顥), 정이(程伊), 주자(朱熹)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賢)이 모셔져 있는 향교는 명성 있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성현의 가르침은 배우는 이들에게 윤리를 확립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물론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유자들이 지향하는 삶은 유가의 윤리를 체득하여 모범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이것을 자신에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함께 윤리에 맞는 모범적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향교가 더욱 명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위치가 좋기 때문이다. 권섭은 문경의 주산이라 할 수 있는 주흘산(主屹山)이 뒤쪽에 솟아 있는데 하늘을 가로지른 밝고 흰 모습이 금강산이나 설악산과 같다고 하였다. 향교에 이르러 주위의 경관을 살펴보면 양편에 산줄기가 뻗어 나와 있고 향교가 그 가운데 자리하니 매우 안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풍수 지리적으로도 매우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 옛날 이곳에 향교를 배치한 사람들이 향교가 가지는 뜻을 살리기 위하여 이렇게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지금은 향교와 향교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가 그 옆에 자리하고 향교 앞으로는 농사를 짓는 한 집이 살고 있는데 과수원에 과일나무가 아담하게 자라고 있었다.
二曲高臨主屹峰 이곡이라 뒤로 주흘봉이 높이 임해 있어
明宮揖遜好儀容 명궁에 공손히 읍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네
元來七事瞻先後 예전의 일곱 가지 일 선후를 따져 보니
左海文風仰九重 동방의 문풍은 천자를 우러러보았네
권섭은 화지구곡 원림의 제2곡에서 주흘산(主屹山)의 봉우리가 높이 임해 명궁(明宮)에 공손히 읍하는 모습을 생각했다. 명궁은 명(明)나라의 궁전을 말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명나라를 생각하며 제2곡에 솟아있는 주흘산의 봉우리가 이 궁전을 향하여 예를 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명나라를 권섭은 아직도 중국을 지배하는 나라로 인식한 것이다. 청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명나라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적통의 나라를 명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교는 성현을 봉안하고 그 가르침을 베푸는 공간이다. 성현의 가르침은 윤리가 올바르게 실현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중요한 부분은 의(義)가 구현되는 세계이다. 이민족인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하는 현실은 성리학에서는 올바르지 않은 세계이다. 그것은 민족의 문제를 떠나서 성현의 가르침을 실행했던 민족과 그렇지 않은 민족의 전도된 현실을 말한다. 왜냐하면 성현을 숭상하고 그 가르침을 실현하는 동방의 문풍은 중국에서 왔기 때문이다.
제3곡 광수원(廣水院)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의 제3곡은 광수원(廣水院)이다. 향교에서 길을 따라 약 3㎞정도 가면 야트막한 야산 아래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 앞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길 옆에 돌로 된 표지를 만난다. 이 표지에 ‘광수원’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적혀 있어 이곳이 화지구곡 제3곡인 광수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수원의 행정구역 상 명칭은 문경시 문경읍 고요리이다. 제4곡인 고요성[고요리]과는 멀지 않은 곳이다. 광수원 앞에는 이 마을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450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마을 앞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시보호수(고유번호 11-26-3)인 이 느티나무는 그 높이도 높이지만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서 농사를 짓는 마을 사람들이 잠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넉넉히 제공하고 있었다. 이 느티나무가 자리하는 곳에서 작은 길을 따라가면 문경새재로 난 큰 도로를 만나고 이 도로를 건너면 폭이 넓은 시내를 만난다. 아마도 그 옛날 이 시내는 많은 물이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광수(廣水)라는 지명도 이 때문에 붙혀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광수원(廣水院)은 강선(講先), 광선(光先), 광원(廣院)이라 하는데 고요리 남서쪽 길 옆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넓고 큰 서당을 지어 학동을 가르쳤던 곳이라 하여 광원이라 하였다가 전주 이씨가 1800년경에 글방을 다른 동네보다 먼저 차려 강론하였다 하여 강선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며 이 서당에서 배운 유자들이 영광을 먼저 누리라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갈평, 평천 쪽으로 흐르는 물이 이곳에서 합쳐져서 넓은 냇가를 이룬다고 해서 광수원(廣水院)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신북면 광수원리(廣水院里)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고요리에 병합되었다. 고요의 서남쪽에 있으며, 옛날 계립령로(鷄立嶺路; 지릅재길)를 왕래하던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다고 하나 기록에는 찾을 수 없다.
화지구곡 제3곡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4′17.70″ ∙경도 : 128° 08′29.53″ ∙고도 : 210m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 제3곡인 광수원(廣水院)은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굽이는 아니다. 물길을 끼고 있는 한 굽이지만 빼어난 경치를 가진 공간은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마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권섭(權燮)이 이 마을을 화지구곡의 한 굽이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광수원’이라는 마을이름에 주목하였다. ‘넓은 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마을 이름과 그 당시 광수원의 지형이 너무 달라서 어떻게 이러한 이름이 지어졌는가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권섭은 이 마을을 통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 가는 사물을 생각하였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상감(無常感)을 느낀다. 이러한 느낌을 권섭은 광수원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굽이를 화지구곡의 제3곡으로 설정한 듯하다.
삼곡은 광수원(廣水院)이다. 작은 마을이 언덕 아래에 있고 그 앞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처음에 광수라고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其曰三曲爲廣水院小村依隴千畝在前始名廣水是然疑於滄桑變故
화지구곡 제3곡에 이르러 권섭(權燮)은 언덕 아래에 자리한 작은 마을을 만났다. 이 마을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특이한 경관을 찾을 수 있는 그저 평범한 마을이었다. 권섭은 이 마을 이름에 관심을 가졌는데 ‘광수(廣水)’라는 의미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을의 모습이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지명은 그 지형의의미를 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광수원의 지형이 넓은 물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마을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광수원에 도착한 권섭은 이 굽이의 어디에서도 넓은 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의미를 생각하였다. 뽕나무밭에서 푸른 바다로 변한 큰 지형의 변화를 생각한 것이다. 그 옛날 이 마을은 큰 물줄기를 끼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지형이 변화하여 이름만 남고 지형은 변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굽이를 바라보고 사람들은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의 유한성(有限性) 속에서 유흥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섭은 달랐다.
三曲如浮萬斛船 삼곡이라 만곡을 실은 배가 떠 있는 듯하니
村名廣水幾何年 광수라는 마을 이름 얼마나 오래 되었나
然疑自古滄桑事 그 옛날 창해의 변화 있었는지 없었는지
葛畝鋤歌又可憐 칡 우거진 밭의 김매는 노래 어여쁘네
권섭(權燮)은 화지구곡 제3곡의 지형을 ‘만곡(萬斛)을 실은 배가 떠 있는 듯하다’ 하였다. 그 옛날의 이 굽이의 지형은 큰 배가 이 마을 앞으로 난 물길을 따라서 올라갈 수 있는 굽이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을 둘러서 흐르는 시내에 이러한 배를 띠울 수 없다. 그는 ‘이 마을 이름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하며 현재의 지형과 다른 과거의 지형을 생각하였다. 마을의 이름과 지형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이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는 큰 지형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마을의 이름이 광수원이 된 것이다.
권섭은 이내 과거사를 잊고 눈앞에 전개되는 밭 매는 농부들에게관심을 쏟는다. 이 제3곡은 무이구곡가 제3곡의 시상과 매우 흡사하지만 무이구곡가에는 도가적인 전설과 감상성이 짙은 데 비해 화지구곡가에는 현실성이 짙게 드러난다.
제4곡 고요성(古要城)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의 제4곡은 고요성(古要城)이다. 고요성은 지금 문경시 문경읍 고요리이다. 제3곡인 광수원(廣水院)에서 마을길을 따라서 나오면 큰 도로에 이르고 이 도로를 건너가면 광수원 앞으로 흐르는 시내를 만난다. 이 시내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서 왼편으로 1㎞정도 가면 언덕 아래에 작은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마을이 고요리이다. 고요리는 장자산과 운달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어 도로에서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을 앞 언덕을 돌아가면 갑작스레 마을이 나 타나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늑한 느낌을 준다. 전주 이씨 집성촌인 고요리는 광수원처럼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어서 그 마을이 오래 전에 자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난 마을 노인들은 이마을이 매우 오래 전에 형성되었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피난처가 될 정도로 안전한 곳이라고 자랑하였다.
고요리는 고요(古堯), 고요성(古聊城), 괴성(槐城)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는 고요성리(古聊城里)로 신북면(身北面) 지역이었다가 1932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신북면이 문경면에 병합되어 문경면 고요리가 되었다. 이전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봉명리, 광원리와 파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였다. 일부에서 말하기를 고려시대에 고주부사(高主府使)가 당포(唐浦)에 있을 때에 요성(聊城)이 역촌(驛村)이라 이와 구별하기 위하여 고요성 또는 고성(古城)이라 하다가 문희현(聞喜縣)으로 이관되고 고주부(高主府)가 없어짐으로 고요성을 줄여서 고요(古堯)라 하였다고 하나, 옛 기록에 이 지역에 고주부가 있었다는 사실은 찾을 수가 없으며, 조선시대 문경현지 방리조(坊里條)에도 고요성리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고요리라 한 것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부터라 하겠다. 또한 기성, 괴성이라 하는 것은 고성(古城)의 변음이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마을 어귀에 천년이 넘는 느티나무[槐木]가 있어 성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괴성(槐城)이라 한 것이 변음되어 기성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자기 자랑 좋아하는 인사들은 전주 이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고 왕권이 미치지 않아도 요순시대(堯舜時代)처럼 순박하게 산다고 고요성(古堯城)이라 했다고 한다. 화지구곡 제4곡인 고요성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4′31.69″ ∙경도 : 128° 09′03.04″ ∙고도 : 231.6m
고요성(古要城)을 화지구곡 제4곡으로 설정한 것은 그 마을이가지는 역사성 때문이다. 권섭(權燮)의 기록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역참(驛站)이 있었던 것 같다. 역참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 등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및 통신기관으로 우역(郵驛)이라고도 하였다. 역참이 이러한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경비가 필요했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경비를 충당하도록 공수전․지전(紙田)․장전(長田)․관전(館田) 등을 지급하여 사신왕래 및 역사(驛舍)의 수리, 사무용품을 구입하는 등 역참의 소요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역참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매우 번화한 장소이고 인력 및 물자가 풍부한곳이라는 뜻도 된다. 따라서 고요성은 역참이 설치되어 있을 때는 매우 번성했던 마을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권섭이 방문했을 때는 이러한 번성이 많이 쇠퇴하여 그 흔적만 존재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러한 역사성을 가진 마을에서 권섭은 고요성을 바라보았다.
사곡은 고요성(古要城)이다. 나무가 우거진 조그마한 언덕 안에 작은 평지가 있다. 울창한 숲 안으로 마을이 언뜻언뜻 보이고 큰 냇물이 그 밖으로 흐르며 물레방아가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이곳은 역참이었는데 지금은 없다.
其曰四曲爲古要城童童一拳之阜中小坪而蒼蒼內有村落隱映大川流其外水碓軋軋而鳴是郵傳之今廢
권섭은 화지구곡 제4곡에 이르러 나무가 우거진 조그마한 언덕 아래에 자리한 고요성(古要城)을 만났다. 작은 평지 안에 자리한 고요성은 빼어난 경관을 가진 마을이 아니라 물레방아 소리가 삐걱삐걱 소리내며 돌아가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마을 뒤편에 울창한 숲이 우거지고 마을 밖으로 큰 냇물이 흐르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이 굽이에 옛날에 역참(驛站)이 자리를 했으나 지금은 없다고 하였다. 제3곡인 광수원(廣水院)처럼 고요성도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역사성을 가진 마을에 이르러 권섭은 자신의 감회를 시에 담아 읊었다.
四曲川橫臥立岩 사곡이라 시냇물이 바위들을 둘러 흐르니
亂松覃葛影毿毿 우거진 소나무와 칡 그림자 길고도 기네
幽村軋軋鳴前碓 조용한 마을 삐걱 소리는 옛날의 방아요
斷麓蒼蒼照下潭 가파른 산기슭의 푸른빛 연못에 비쳐 있네
권섭(權燮)은 화지구곡 제4곡인 고요성(古要城)에 이르러 마을이 조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을을 둘러 흐르는 시냇물이 누워 있는 바위, 서 있는 바위를 돌아서 흘러가고 우거진 소나무와 칡덩굴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었다. 권 그 옛날 역참(驛站)이 자리하고 있을 때의 모습을 좀처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마을이었다. 역마(驛馬)가 오고가며 사람들이 나고 드는 번화한 마을이 아니라 물레방아 소리가 멀리서도 들리는 고요한 마을이었다. 이러한 마을의 모습에서 권섭은 사물의 변화에서 오는 무상감(無常感)을 가질 수 있었다. 너무나 쉽게 변해버리는 사상(事象)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섭은 이러한 감정에 빠지지 않았다.
많이 변해버린 마을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가파른 산기슭에 비치는 푸른빛이다. 시간이 흐르며 모든 사물들은 변해가서 그 모습을 되돌릴 수 없지만 생명을 가진 사물들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서 그 푸른빛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권섭은 연못에 비치는 이 푸른빛을 바라보며 유한(有限)이 가져오는 무상감을 극복하였던 것이다.
제5곡 화지동(花枝洞)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의 제5곡은 화지동(花枝洞)이다. 제4곡인 고요성(古要城)에서 마을길을 따라 걸어가면 시내에 놓인 다리를 건너 큰 도로에 이른다. 이 도로를 따라 2㎞정도 가면 우뚝 솟은 성주봉을 만나는데 이 성주봉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이 화지동인데 행정구역상으로는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이다. 화지동은 바위산 기슭에 자리하여 누른 빛 바위가 마을 뒤에 배경을 이루고 마을 앞은 산에서 흘러오는 작은 개울이 흐른다. 개울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 마을로들어서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집들을 만난다. 이 집들 사이에 옥소(玉所) 권섭(權燮)이 살았던 집이 있다. 이 집은 마을의 제일 위쪽에,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으로 있는데 후손인 권희달씨가 마을 아래쪽에 살면서 관리를 하고 있다.
화지동[당포리]은 본래 신북면(身北面)의 화지리(花枝里)와 산문리(山門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2개동을 병합하여 당포리(唐浦里)라 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에 문경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 있던 장자, 단봉, 석봉 등의 광산 경기 호황으로 번성하였으나 광산 폐광 이후 외래인의 퇴거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북쪽은 용연리, 평천리, 서쪽은 팔령리, 남쪽은 고요리와 접해 있다. 특히 화지동은 당포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꽃집(상여집)이 있어 고주골이라 하였다. 또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시대 고주부사(高州府使)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고주골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수암 권상하 선생의 조카인 옥소(玉所) 권섭(權燮)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의 뒷산인 성주봉을 바라보니 마치 매화가 활짝 핀 것 같다 하여 고주골을 화지리[화지동]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인근 사람들도 이 마을을 화지리로 부르는 사람은 없고 고주골이라 부른다. 1920년 갈평으로 이전되기 전까지는 신북면(身北面) 사무소가 이곳에 있었다.
화지구곡 제5곡인 화지동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5′07. 34″ ∙경도 : 128° 09′47.08″ ∙고도 : 273m
주자(朱子)가 무이구곡(武夷九曲)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이황(李滉)이 도산구곡(陶山九曲) 제5곡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던 것처럼 권섭(權燮)도 화지구곡 제5곡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는 주역의 구오(九五), 즉 비룡재천(飛龍在天) 격인 양오(陽五)의 자리를 택한 것이니 깊은 뜻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이 화지동은 높은 산 위의 큰 바위들이 하늘 높이 울부짖듯 솟아있고 마을은 수많은 감나무로 둘러싸여 가을이 되면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으며 원근의 절에서 들여오는 종소리를 들으면 솟아오르는 지취(旨趣)가 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라고 권섭은 말하였다.
그 위로 1리도 안 되는 곳에 큰 산이 우뚝 솟은 바위가 하늘에 맞닿을 정도로 높고 그 안에 골짜기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다. 빽빽한 숲이 마치 큰 절의 산문처럼 그 입구를 가리고 있으며 빙 돌아 들어가면 둥그렇고 깨끗하면서 밝은 곳이 있다. 거기에 백여 명의 주민이 즐비하게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천여 그루나 되는 감나무가 둘러 있는데 가을이 되어 감이 붉게 익으면 아름다운 모습이 마치 무릉도원 같다. 그 남쪽 일대 송라(松蘿)가 우거진 곳에 바로 나의 집이 있다. 삿갓을 쓰고 호미를 메고 왕래하는 모습이 그림 같다. 멀고 가까운 곳에 절이 있어서 종소리가 서로 들려오면 온갖 정취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제5곡이다.
其上未一里大岳巉巖而際天呀然一洞壑林樹翳其口如大伽藍山門紆廻穿入圓淨而昭明百餘居民櫛比成村千柿繞之及秋爛纈勝似武陵桃源其陽一帶松蘿有我之廬籉簑鋤犁往來如畵僧寺近遠若鐘聲之相聞百種之趣未可勝言是爲第五曲
권섭(權燮)은 화지동(花枝洞)을 묘사하며 큰 산의 우뚝 솟은 바위가 하늘에 맞닿을 정도 높다고 하였다. 실제로 화지동에 이르면 마을 뒤편으로 바위산이 높이 솟아 있고 산과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한 굽이를 만들며 절경을 이룬다. 이러한 절경은 주위의 산들이 있어서 가능하였는데 화지동을 그린 화지장도(花枝莊圖)를 보면, 동쪽에는 운달산(雲達山) 상봉(上峰), 북쪽에는 관음봉(觀音峯), 서쪽에는 취봉(鷲峯), 남쪽에는 장재봉(長在峯)이 솟아있고 서산(西山) 안에 여섯 마을이 있으니 제1동이 수동(水洞), 제2동이 험동(險洞), 제3동이 쌍계동(雙溪洞), 제4동이 구왕동(九王洞), 제6곡이 성주동(聖主洞)인데 성주동 아래가 바로 화지동이다.
당시에는 성주봉 골짜기 쌍계동에 쌍계사(雙溪寺)가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절을 태우고 스님들은 산 너머 김룡사(金龍寺)로 떠났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주춧돌을 볼 때 당시 쌍계사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던 것으로 짐작되고 그 곳은 지금도 아주 절경을 이루고 있다. 권섭은 이 절의 종소리를 들으며 깊은 사색에 빠지기도 하였다. 화지동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감나무가 있었다. 천여 그루의 감나무가 마을을 둘러있었는데 가을이 되어 감이 붉게 익으면 아름다운 모습이 무릉도원(武陵桃源) 같다고 하였다. 지금도 화지동엔 감나무가 많은데 권섭이 살았던 당시의 감나무보다는 적은 수이다. 이러한 굽이에서 권섭은 송라(松蘿)가 우거진 곳에 집을 짓고 시인으로 살아갔다.
五曲花枝洞壑深 오곡이라 골짜기 깊고 깊은 화지동
百籬千柿翳如林 감나무 울타리가 숲처럼 마을을 가리네
村耕雨露僧鍾月 밭에 이슬비 내리고 달 밤 절간 종소리 들리면
不盡斯翁詠讀心 늙은이의 솟아나는 시심 다할 수 없네
화지동(花枝洞)에 사는 권섭(權燮)은 시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의 주위 환경이 절로 시를 쓰게 하였다. 마을의 주위를 둘러싼 아름다운 산들의 봉우리, 마을의 뒤편에 솟아있는 바위산, 마을을 가리고 있는 감나무 숲, 밤이 되면 은은히 들려오는 절간의 종소리 등이 권섭을 시인으로 만들었다.
제6곡 산문계(山門溪)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의 제6곡은 산문계(山門溪)이다. 화지구곡 제5곡인 화지동에서 마을길을 따라 나오면 큰 도로를 만난다. 이 도로를 따라서 4㎞정도 가면 시내가 한 굽이를 이루는 공간을 만나는데, 전해오는 말에, 화지동에서 갈평(葛坪)으로 가다보면 강 건너에 시루봉이 있는데 이 산 봉우리에 우뚝 솟은 3개의 바위를 옥삼(玉三)이라는 유자가 삼문(三門)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이곳에 살았던 고주부사(高州府使)가 마을 이름을 ‘살뫼’라 하게 되자 이 후부터 마을 사람들이 ‘살뫼’ 또는 ‘살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굽이는 현재 댐 공사를 위해 주변의 산들을 마구 파헤치고 있어서 지형이 달라졌지만 이전에는 시내 양편으로 바위가 솟아 있어 산문(山門)을 이루는 공간이었다. 제5곡 쪽에서 이 굽이를 바라보면 산문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제7곡 쪽에서 바라보면 완연히 산으로 들어가는 문(門)처럼 생긴 지형을 확인할 수 있다.
화지구곡 제6곡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5′53.47″ ∙경도 : 128° 09 ′ 52.85″ ∙고도 : 250.8m
이 굽이는 교묘한 절벽과 층대, 흰 바위가 시냇물과 못과 더불어 장관을 이루었기 때문에 권섭(權燮)이 누각을 짓고 석실 내에 엄려(广廬)를 만들어 요조한 취미를 맛보았다. 이러한 제6곡이 댐 건설로 인하여 많이 훼손돼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없게 된 점이 너무 아쉬웠다. 다만 권섭(權燮)의 기록을 통하여 굽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아침저녁으로 앉았다 누웠다 하며 편안히 지낸다. 거기서 몇 걸음 나가면 산문계(山門溪)가 있는데 교묘하게 생긴 절벽과 층대 평평한 흰 바위가 격렬한 여울 맑은 못과 함께 형세를 이루어 지극히 그윽한 정취가 있다. 내가 거기에 휘영각(輝映閣) 하나를 짓고 석실에 암자를 만들어 두고 흥을 붙일 만한 곳으로 삼았다. 이곳이 육곡이다.
坐臥朝暮安此身世其步屧之外有山門溪絶壁層臺之巧平巖之白與激湍渟淵而爲勢極有窈窕趣味我作一架輝映之閣又作山門广於石室之內以寓一宗興寄是爲諸六曲
산문계(山門溪)는 화지동(花枝洞)에서 멀지 않아 권섭(權燮)은 자주 이곳을 오고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굽이는 교묘하게 생긴 절벽과 층대를 이룬 평평한 바위가 격렬한 여울의 맑은 못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다. 권섭은 이 공간에 휘영각(輝映閣)을 짓고 석실에 암자를 만들어 오고가며 은거하였다.
六曲孤亭出小灣 육곡이라 외로운 정자 여울 가에 솟아 있고
千峰回複作重關 수많은 산봉우리 겹겹이 둘러 있네
何時施設朝家議 언제일까 조정에서 의논을 마친 다음
目在幽人早夕閑 은거하여 조석으로 한가롭게 지낼 날은
권섭(權燮)은 산문계(山門溪)가 자리하는 제6곡을 은거하기 좋은 공간으로 생각했다. 그가 산문계를 대상으로 지은 시를 보면 여울 가에 외로운 정자가 솟아있고 수많은 산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 공간이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외로운 정자는 그가 이 굽이에 세운 휘영각(輝映閣)으로 볼 수 있다. 산문계가 흐르면서 만든 맑은 못에 이 휘영각이 비취며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었다. 그리고 둘러있는 수많은 산봉우리는 바깥 세계와는 단절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화지구곡 제6곡은 이러한 공간이기 때문에 세상과 떨어져 은거하기 알맞은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권섭은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마치고 이 굽이에 이르러 한가롭게 지낼 날을 그리며 은거하는 삶을 꿈꾸었다. 이름 그대로 산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리하는 시내에서 권섭은 혼탁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청정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제9곡 대원(大院)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 제9곡은 대원(大院)이다. 관음원(觀音院)에서 길을 따라 2㎞정도 올라가면 하늘재에 이르는데 이곳이 대원이다. 이 재를 넘어가면 조령(鳥嶺)이 나오고 그 바깥에는 월악산(月岳山)이 있다. 이곳은 긴 뿔형 지세로서 여기에 오르면 다시 앞이 확 트인다. 위로는 하늘의 해, 달과 접하고 아래로는 온갖 산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곳이 이어진다. 이 굽이는 백두대간의 하나로 많은 등산객이 이 굽이를 따라서 포암산을 올랐다.
화지구곡 제9곡인 대원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8′53.90″ ∙경도 : 128° 06′40.49″ ∙고도 : 556.9m
대원의 지명은 계립령(鷄立嶺)이다. 이 명칭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대원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로 거슬러 오른다. 이 기록에는 아달라 이사금 3년에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 ”고 했다. 삼국사기 의 김유신(金庾信) 조에 등장하는 이름은 마목현(麻木峴)이다.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金春秋)에게 보장왕(寶藏王)이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같은 책 권45 「열전」의 온달(溫達) 조에는 “계립령과 죽령 북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온달의 출사표도 등장한다.
『고려사(高麗史)』에 오면 대원령(大院嶺)이란 이름이 나타난다. 고려 고종 42년(1255) 10월에 몽고 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었을 때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대원령은 미륵대원에서 시작되는 말이다. 역사학자들은 미륵사지의 창건 연대를 대략 10세기로 어림잡고 고려시대의 절 이름을 대원사로 보는 견해에 의견을 같이한다. 우리나라의 역참이 전국적으로 체계를 갖추는 것 역시 고려시대이니 본래의 절에 원(院)을 두고 대원, 혹은 미륵대원이라 불렀을 것이라 추측된다. 하늘재 또한 이 무렵에 대원령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골점(麻骨岾) 봉수를 기록에 남기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를 정리하여 “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 한다.”하고 “속칭 마골산이라 한다.”하였다. 한편으로 흥미로운 점은 미륵대원에 관한 기록이 사라지는 일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새재 길이 새로 개척되고 하늘재 길은 점점 그 쓰임새를 잃게 되지만 가령 “관음원은 계립령 아래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여전히 하늘재 길의 역원이 등장하는 반면 유독 대원과 미륵사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따라서 미륵대원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오르면 큰 고개의 중턱이다. 그 이름은 대원(大院)인데 곡의 아홉 번째로서 여기가 끝이다. 산이 높아 하늘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면 조령이 있고 뒤로는 월악이 솟아 있어서 앞뒤로 서로 조응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다. 땅의 형세가 여기에 오르면 다시 환하게 툭 트여서 위로는 하늘의 해와 달에 닿을 듯하고 아래로는 아득하게 세상 밖의 경치가 펼쳐진다. ‘여기부터 구경꾼이 올라오지 않으니 인간 세상이 아닌 별천지라네(自是遊人不上來除是人間別有天)’라는 싯구를 읊조리다 보면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이미 그 안에 내 거처를 두었고 이미 ‘구곡’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또한 그것을 글로 기술했으니 마땅히 나의 후손들이 그것을 알아야 하겠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步步登登而去爲大嶺之腰其名大院曲之第九而終焉天所以限南北也前去爲鳥嶺外立有月岳爲掎角之形地勢登此復豁然而開上可接天中日月下濛濛然世外雲煙咏來自是遊人不上來除是人間別有天之句意想悠然旣有我居於中間旣有九曲之名號又有記述之文則宜使我孫知之玆識之
권섭(權燮)은 대원(大院)에 이르러 화지구곡을 정리하였다. 주자(朱子)의 「무이도가(武夷櫂歌)」의 한 구절을 읊조리며 자신이 경영했던 화지구곡을 후손에게 길이 전하기 위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화지구곡을 도에 들어가는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이름난 고을이 자리하는 공간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굽이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권섭은 화지구곡의 경영을 통하여 도학(道學)을 현현하려는 의지보다 각 굽이에 자리하는 이름난 마을을 시로 읊어 길이 전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九曲登高始豁然 구곡이라 높이 오르니 눈 앞이 확 트여
不知斯處是窮川 모르겠네 여기가 시냇물 시작하는 곳인지
千山在下千峰立 발 아래 수많은 산들 봉우리가 즐비하니
日月雲烟是別天 해와 달과 구름과 이내 이곳이 별천지라
대원(大院)에 오른 권섭(權燮)의 눈 앞이 확 트인다. 화지구곡을 감돌아 흐르는 시내의 근원이 자리하는 대원에 이르니 물줄기는 보이지 않고 확 트인 경관이 자리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여기가 시냇물이 시작하는 곳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실제로 대원에 오르면 포암산(布巖山)이 뒤로 바위 벼랑을 임해 있고 앞으로는 지나온 구곡의 굽이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어디에 물줄기가 있는지 찾을 수 없다. 발 아래로 수많은 산봉우리가 자리하니 대원은 해, 달, 구름, 이내만이 존재하는 굽이이다. 권섭은 이러한 공간이 별천지라 하였다. 세상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 고개가 바로 별천지인 것이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역사를 가진 이 고개에서 권섭은 화지구곡을 마감하니 이 역사성이 아래로 각 굽이에 이어져 나머지 여덟 굽이에 명성이 자자한 마을이 자리하는 것이다.
제7곡 갈 평(葛坪)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의 제7곡은 갈평(葛坪)이다. 제6곡인 산문계(山門溪)에서 길을 따라 3㎞정도 가면 확 트인 굽이에 자리하는 마을을 만난다. 이 마을이 갈평인데 이름 그대로 평평한 공간에 자리하는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마을의 뒤편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자리한다. 이 산에는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산 앞에는 용흥 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초등학교 옆으로 관음요(觀音窯)가 야산의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갈평은 관음동(觀音洞)으로 가는 길과 동로면(東魯面)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교통의 요지이나 교통량이 많지 않아 마을이 고요하여 한낮에도 멀리서 닭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대미산(黛眉山)이 둘러있어 이 굽이는 큰 산으로 둘러있는 분지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아홉 폭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구병산(九屛山) 산자락에 벌판을 이루었던 이곳은 옛날부터 칡이 널려 있었기 때문에 갈평 또는 갈벌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마을 뒤로는 구병산이 우뚝 솟아 마을을 굽어보고 있으며 앞으로는 넓은 들 건너에 서당골 농원이 한눈에 들어왔다마을을 들어서는 1㎞가량의 진입로가 가을이 되면 향기를 물씬 풍기는 코스모스로 울긋불긋 곱게 단장한 채 다소곳이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곧바로 마주치는 것이 느티나무고목이다. 수령이 4백년이 넘는다는 이 느티나무는 예전에는 6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4그루만이 남아 있다. 그래도 시원한 매미 소리와 함께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있고 그 바람에 하늘거리는 잎새의 그림자가 있어 농사일에 지친 주민들에게 한여름 뙤약볕을 가려주기에 충분하다.
갈평(葛坪)은 본래 신북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갈산리(葛山里)와 뇌암리(腦岩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갈평리(葛坪里)라 하였으며 1932년에 문경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갈평리에는 문경읍 갈평출장소와 파출소, 용흥초등학교가 있다. 옛 문경현지(聞慶縣誌) 에는 갈평리 라는 명칭이 없고, 가을벌(加乙伐)이라는 동명만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갈정승(葛政丞)이 넓은 벌판이 있는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갈정승의 들이라 하여 성[葛]과 들[平]을 합하여 갈평이라 하였고 당시에는 이곳에 칡덩굴이 꽉 엉켜 있었는데 이것을 쳐서 없애고 논밭을 개간했다 하여 갈벌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화지구곡 제7곡인 갈평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7′18.29″ ∙경도 : 128° 09′29.71″ ∙고도 : 285.8m
권섭(權燮)이 갈평(葛坪)을 화지구곡의 한 굽이로 설정한 것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섭의 기록에 의하면, 갈평의 울창한 숲은 황장봉산(黃腸封山)이니 황장목(黃腸木)이 자라는산이다. 황장목은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귀한 소나무이므로 조선시대 관청에서는 일반인들이 황장목을 벌채하는 일을 막기 위해 일정한 지역에 경계를 그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갈평의 용흥초등학교 뒤편에 자리하는 야산에 소나무가 빽빽이 자라고 있는데 이 산이 황장봉산으로 추증된다.
칠곡은 갈평(葛坪)이다. 그 땅의 형세가 평평하고 넓으며 한줄기 냇물이 길게 흐른다. 그 가운데에 황장봉산(黃腸封山)이 있어서 푸르고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몇 개의 자그마한 동굴이 산에 의지해 뚫려 있는데, 이것은 분명 관문을 막는 중요성 때문에 만든 것이다. 조정에서 영남 지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언제 이루어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其曲之第七者爲葛坪坪勢平廣一水流長中有黃腸之封蒼鬱成林數三峒戶小小依山是宜作關防之重廟筭嶺度不知何日成就
산문계(山門溪)는 화지동(花枝洞)에서 멀지 않아 권섭(權燮)은 자주 이곳을 오고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굽이는 교묘하게 생긴 절벽과 층대를 이룬 평평한 바위가 격렬한 여울의 맑은 못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다. 권섭은 이 공간에 휘영각(輝映閣)을 짓고 석실
또 권섭(權燮)은 갈평(葛坪)에 이르러 산에 뚫려 있는 몇 개의 자그마한 동굴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동굴이 아마도 그 옛날 문경새재를 방어하는 군사들이 이 굽이를 수비할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 생각하였다. 갈평에서 길을 따라 가면 하늘재가 나타난다. 이 하늘재를 넘어가면 바로 충청북도 괴산군이다. 북쪽에서 남하하는 적들이 통과하는 요새가 문경새재이며 새재 외에 또 다른 요새가 하늘재이다. 하늘재로 넘어와서 치달으면 바로 갈평에 이르니 조정이 그만큼 갈평의 군사적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섭은 자신이 사는 화지동(花枝洞)에서 본집이 자리하는 청풍을 오고가며 살았는데 오고가며 바로 이 갈평을 지났다. 그가 사랑했던 부실(副室) 이씨 부인을 보기 위해 하늘재를 넘어 갈평을 지나 화지동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오고가는 사이에 이 갈평의 아름다운 풍광을 익히 보고 화지구곡의 한 굽이로 설정한 것 같다.
에 암자를 만들어 오고가며 은거하였다.
七曲松風吼似灘 칠곡이라 솔바람이 여울 소리 같으니
誰人來入是中看 그 누가 찾아와서 이곳을 보았을까
鷄鳴犬吠皆仙境 닭 울음 개 짓는 소리 모두가 선경
白屋蕭疎分外寒 조촐한 초가에 분수 넘는 청빈함이네
화지구곡 제7곡인 갈평은 황장봉산(黃腸封山)의 수많은 소나무를 울리는 바람소리가 여울 소리처럼 들려오는 굽이었다. 그러나 이 굽이는 사람들이 즐겨 찾아오는 공간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굽이의 경치가 기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평한 대지에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선 마을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섭의 안목은 달랐다.
그는 갈평에서 들려오는 닭 울음 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모두 선경(仙境)이라 하였다. 갈평에 펼쳐지는 경관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계의 경관이라는 의미이다. 산문계(山門溪)를 기점으로 혼탁한 세계와 단절하며 도착한 공간이 갈평이다. 산문계가 세상과 연결됨을 막았다면 갈평은 인간 세상과는 다른 신선의 세계가 펼쳐지는 공간이었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권섭과는 달리 인욕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청빈한 마음을 가졌다면 이 굽이가 선경(仙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권섭은 조촐한 초가에 살면서 청빈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 ‘문경(聞慶)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 말하고 있다.
제8곡 관음원(觀音院)
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의 제8곡은 관음원(觀音院)이다. 제7곡인 갈평에서 길을 따라 3㎞정도 가면 시내 오른쪽으로 30여 가구의 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이 관음원인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 놓은 입석에는 문막(관음1리)이라 적혀 있다. 화지구곡 제9곡인 대원(大院)으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보면 오른쪽에 개울이 흐르고 개울의 다리를 건너가면 멀리 느티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느티나무 뒤로 30여 집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뒤로 멀리 바위 산인 포암산(布巖山)이 솟아 있다. 그 옛날 이길을 지나 한양(漢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날이 저물어 산을 넘지 못할 경우 이 마을에서 쉬어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을 앞에 펼쳐진 계단식 논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를 심기 위해 분주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모두 인심이 좋은 것으로 보아 예전에 이 길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펼쳤을 훈훈한 정을 짐작하게 하였다.
관음원은 본래 신북면(身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에 관음리(觀音里)라 하였다. 신라시대부터 관음사(觀音寺)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절이 있던 곳에 약사여래(藥師如來) 석불입상(石佛立像)만 남아 있다. 이 마을은 지릅재길[鷄立嶺路]로 이어지는데 신라 제8대왕 아달라 이사금 3년(156)에 신라에 의하여 소백정맥을 넘는 유일한 통로로 개통되면서부터 생겼다고 볼 수 있으니 역사 깊은 마을이다. 1932년에 문경면(읍)에 편입되었고, 북쪽은 하늘재(大院嶺) 너머의 충북 미륵리, 동쪽은 중평리, 남쪽은 평천리, 동남쪽은 갈평리와 접하고 있다.
화지구곡 제8곡인 관음원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8′33.42″ ∙경도 : 128° 08′18.47″ ∙고도 : 358.7m
관음원(觀音院)이라는 이름에서 이 굽이에 원(院)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원(院)이란 지금의 여관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는 10리 길에 려(廬;초막)가 있고 30리 길에 숙(宿;여관)이 있었는데 후대에는 10리 길에 장정(長亭;쉬는 집)이 있고 5리 길에 단정(短亭;쉬는 작은 정자)이 하나씩이 있었으니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관음원은 이러한 역할을 하는 원이 존재했던 마을이었는데 관음원에 원이 설치된 까닭은 이곳이 하늘재를 넘어가는 길목으로 나그네가 쉬어 갈 수 있는 굽이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골짜기 외딴 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이 지치면 범이나 표범, 도둑 등에 대한 염려로 길손의 걱정은 더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원을 설치하여 나그네가 편히 쉬어 갈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조령산성 안에는 관음원 외에 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이 있었고 현의 서쪽 15리인 이화령 아래 요광원(要光院)이 있었으며 현의 북쪽 4리에는 화봉원(華封院)이 있었다.
관음원에는 몇 개의 가게가 언덕에 의지해 있으며 모두 술을 팔아 생계를 삼는다. 그 위아래 물이 흐르는 깊숙한 골짜기 사이에 선녀담과 세이동이 있는데 이곳들은 모두 작은 정자를 짓고 즐길 만하니 이곳이 팔곡이다.
其曰觀音院數店倚岸沽酒資生其上其下碕流奧峽之間神女潭洗耳洞皆可作小亭而怡悅者爲第八曲
관음원(觀音院)은 몇 개의 주막이 언덕 아래에 자리하며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하늘재를 오고가는 나그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이러한 마을의 이름에 관음(觀音)이라는 의미가 담기게 된 사연이 전해진다. 신라시대 가나문이라는 보살이 이곳에 관음사라는 절을 짓고 난 후, 수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에 절을 세운 사람의 이름을 따서 ‘가나문’ 또는 절의 이름을 따서 ‘관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라시대에는 이곳이 북쪽에서 남쪽 계림[慶州]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전략상 요충지였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매우 번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굽이는 아래로 펼쳐지는 경치가 아름답다. 물이 흐르는 깊은 골짜기 사이에 자리하는 신녀담(神女潭)과 세이동(洗耳洞)은 작은 정자를 지어서 노닐 만한 장소라고 권섭은 언급하였다. 아울러 마을 뒤로 드리운 포암산(布巖山)의 위용도 이 굽이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八曲山門一閉開 팔곡이라 산문이 한 번씩 열렸다 닫히고
倒碕殘咽水縈洄 여울물 굽이굽이 세차게 흐르며 요란하네
依崖小店棲生計 언덕 위의 작은 가게 생계가 처량하니
盡日行人斷去來 하루 종일 오고가는 행인 하나 없네
산문(山門)이 한번 열리고 닫히매 제8곡이 나타나니 여울물이 굽이굽이 세차게 흐르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언덕 위에 자리한 작은 가게는 하루 종일 오고가는 행인이 없어 생계(生計)가 어려웠다. 권섭은 이 굽이를 오고가다 날이 저물면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문경새재가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하늘재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권섭이 묵었던 당시에도 이 관음원은 사람들의 왕래가 뜸하였을 것이다. 권섭은 과거에 오고가는 사람들로 분주하고 떠들썩했을 관음원을 생각하며 지금의 관음원의 상황을 더욱 안타깝게 여겼다.
≪자료출처≫
문경문화연구총서 “문경의 구곡원림(경북대학교 김문기 교수)”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