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곡

문경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

선유구곡(仙遊九曲)

물 맑은 선유동 계곡을 철따라 몇 번 왔다 갔다 했었지만 구곡이 있다는 말은 그 때까지만 해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선유동도 남들이 하도 선유동, 선유동 하니까 덩달아 선유동, 선유동하면서 거름지고 장 가듯이 가본 것이 선유동이었다. 그것도 들머리에 있는 학천정 앞에서만 놀다 갔었는데, 이곳이 바로 선유구곡의 아홉째 굽이인 옥석대란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하긴, 그 때 누군가가 구곡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구곡이란 그런 곳이구나.’ 하면서 한 귀로 흘려듣고 멀뚱거리다가 왔을지도 모른다. 그런 선유구곡을 지난 4월 13일에「선유구곡원림보존회」이만유 회장일행을 따라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다.

구곡이란 말 그대로 아홉 굽이를 말하며 그 빼어난 굽이마다 걸맞은 이름을 붙여두고 물 따라 안개 따라 시를 읊으며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공간이다. 선유구곡은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1876~1956)이 설정設定하여 시를 짓고 즐겼다고 한다. 물론 이전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도암陶巖 이재李縡,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병옹病翁 신필정申弼貞 같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구곡의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설정設定 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봐서 외재 이전에 내려온 구곡의 명칭과 위치를 외재가 “확실히 딱 맞게 바로 잡아 정해 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제1곡 옥하대(玉霞臺)

우리 일행이 들렀던 그 날의 옥하대는 그 이름과 다르게 노을이나 안개 한 점 없이 청명했다. 외재가 시에서 紫騰霞라고 노래 한 것을 보면, 그가 들린 그 날은 우연히도 붉은 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라 몽환적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현상의 일부이긴 해도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안개 속 물소리에, 청정한 계곡 바람에, 나부끼는 수목의 움직임에, 외재는 이미 선계에 첫발을 들여 놓고 있었다.

옥하란 “옥처럼 빛이 곱고 아름다운 노을”을 뜻한다. 이런 세계는 신비한 신선의 세계다. 나는 눈치도 없이 ‘오카, 오카’를 애인 이름 부르듯이 되뇌이면서 유자들이 오갔던 옥하대 공간을 맴돌았다. 대체로 이름이란 대상을 대표하고 전체를 상징한다. 그럼 옥하란 이름은 어디서 연유했을까. 대기의 기운에 따라 생긴 노을에서 노을 하霞자를 붙였을 거고, 옥 비슷한 무엇을 상징해서 구슬 옥玉자를 붙였을 것이다. 옥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옥이란 보석이다. 서양인들은 흔해빠진 돌이나 유리 정도로만 알고 있겠지만 동양인에게는 진귀한 물건이다. 특히 중국인에게는 결혼 예물이자 장식품이라고도 한다. 색이 희어서 여자의 순결을 상징하고, 피부가 흰 여자를 미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미인의 상징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여기서 옥이란 하霞를 꾸며주는 역할로 ‘옥같이 아름다운, 옥처럼 진귀한, 구슬같이 아름다운, 빛이 고운.’ 등의 형용사로 본다면, 옥하대란 ‘아름답고 빛 고운 노을 지는 공간‘이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겠다. 갑자기 옥은 여인네의 전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치장에 주로 쓰인 노리개 감이 바로 옥이었기 때문이다. 옥이란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이란 장미 같고, 장미란 향기 그윽한 여인네 란 느낌이 들었다. 아름답게 단장하고, 붉은 노을에 감싸인 풋풋한 여인네를 생각을 하다보니까 물결 또한 허리 잘록한 에스자 로 굽이쳐 오고 있었다.

일곡에서 구곡까지 그 이름이 각자刻字로 되어 있는 반면 오직 일곡만이 없었다. 책에는 “是仙遊第一曲也 舊有題刻 而爲洪流所泐 今不得以辨基處” 「이곳이 선유 제1곡이다. 오래전에 새긴 글자가 있었으나, 큰물로 인해 돌이 갈라져 지금은 그 장소를 가릴 수가 없다.」고 적혀있다. 글자체가 궁금했는데 장소를 모른다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외재는 선유구곡을 답사하면서 구곡 이름에 걸맞은 시를 지었다. 삶을 관조하고 자연을 예찬하며 속세에서 얼룩진 때를 선유구곡에서 말끔히 씻어내고 궁극에는 신선이 노니는 경지로 가려고 한 듯 보였다. 그러한 이면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외재의 시대에 삶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민초의 삶은 고달팠고, 시절이 하수상하여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이다. 유자의 이상향인 ‘무이구곡’을 동경하면서, 의지할 곳으로 선유구곡을 정하였다고 생각된다. 선생이 태어나기 십여 년 전 대원군의 무리한 개혁과 1866천주교 탄압으로 인한 1866병인ㆍ1871신미양요와 더불어, 개혁의 반동으로 야기된 정정의 불안, 특히 1875운요호 사건과 고종13년의 1876병자수요조약, 일명 강화도 조약 등 개화의 물결은 배운 자들도 감내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선생이 6세 때 1882임오군란, 8세 때 1884갑신정변, 18세 때 1894동학혁명과 1894청일전쟁을 겪고 성장하면서 터져 나온 혼란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였을 것이다. 탈출구는 내면의 정화에서 찾아야 했다. 자연이 있어야 했고, 시가 있어야 했다. 이와 무관치 않게 외재의 시는 선유구곡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옥하대를 마주하며 쓴 시의 첫 두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白石朝暾相暎華 흰 돌에 아침 햇살 밝게 빛나고

晶流寒玉紫騰霞 맑은 시내 찬 옥돌에 안개 붉게 오른다.

변: 가리다, 분별ㆍ판별하다, 따져 물어밝히다.

위: 때문위因爲, 으로 인하여, 때문에, 까닭에.

륵: 돌갈라질륵石解散, 돌이 결에 따라 쪼개지다, 새길륵刻也, 조각하다.

돈: 돋는해돈初升日, 태양이 막 솟아오르는 모양, 비출돈朝日照物, 아침해가 사물을 비추다, 햇빛나는 모양 돈漸出貌.

영: 映영字의 속자. 비출영照耀, 耀빛날요, 비칠영反影, 햇살영日光, 덮을영蔽也폐야.

*노을: 놀. 해 뜰 무렵이나 질 무렵에 공중의 수증

기가 햇빛을 받아 하늘이 벌겋게 보이는 현상.

옥: 옥돌, 빛이 곱고 아름다워 귀히 여기는 돌의 총칭, 옥같이 여기다.

화: 빛날화光也, 빛이 환하게 비치다, 빛이 나다, 화려하다, 광채화光彩.

등: 오를등上也, 올릴등擧也, 샘솟을등涌용也, 뛸등躍也.

하: 노을하彩雲, 멀하遠也, 아득하다, 붉을하服色彩麗, 안개하煙霧.

자: 자줏빛자靑紅間色, 자주빛의 옷 자紫色衣冠.

이 구절을 보면 외재가 지향하는 바가 어디인지 보이는 것 같다. 영롱한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귓속말하듯 속삭이는 계곡 물소리에서 불안한 현실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자연현상이 경이롭고 신비할 따름이다. 경직된 그의 마음은 이미 솜처럼 포근하고 흐르는 물처럼 유연해졌다. 또한 수정처럼 맑고 아름다운 반석위에 붉은 안개마저 피어올라 마치 몽롱한 꿈속을 거닐고 있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이는 피안의 세계,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외재가 비록 유자의 신분이지만, 망각하고 싶은 현실을 생각함에 일출과 노을, 안개와 구름이 어우러진 그의 시에서 신비스러운 면을 볼 수 있었으며, 물 따라 바위 따라 구곡까지 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신선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제2곡 영사석(靈槎石)

1곡에서 약30미터쯤 올라가면 바위에 영사석이란 각자가 보인다. 밟고 있는 넓적한 바위가 언뜻 보기에 여느 바위와 같아 보이지만 영사석의 사槎와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이 바위가 그 바위임을 알 수 있다. 모양이 뗏목 같아 뗏목 사槎를 쓰고 있는 바위가 엄청 크다. ‘신령스럽게靈’ 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유자의 안목에는 그렇게 비친 모양이다. 왜 깊지도 넓지도 않은 공간을 두고 거창한 뗏목을 운운해야 했을까. 다름 아닌 존숭 대상인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명이라고 본다. 중국 복건성에 있다는 무이산 36봉 사이로 흐르는 아홉 굽이 강을 영사석으로 형상화한 조상들의 발상이 돋보였다. 비록 뗏목바위일지라도 물의 발원지를 향해 유람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을 태워 갈 수는 없지만 신령은 가능할 것이다. 사물의 출발점인 원두 찾아가려는 소망을 1행과 4행에서 읊고 있다. 이를 두고 김문기는 ‘선유구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원두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고 곧 만물의 근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以石爲槎喚作靈 돌을 뗏목 삼아 신령을 불러

一路窮源指可聽 한 길로 발원지를 탐색하면 들어줄 수 있으리

사: 떼사筏也, 뗏목.

환: 부를환召也, 부르짖을환呼叫, 울환啼叫환규.

제3곡 활청담(活淸潭)

3곡의 오른쪽 그리 높지 않은 바위에 가로로 활청담이라고 적혀 있다. 글자는 이끼에 가려있어 위장이라도 하고 있는 듯 얼룩져 잘 보이지 않았다. 큼지막한 글씨체는 흐르는 물소리처럼 시원했다. 맑을 ‘청’ 자가 있어 그런지 더 맑아 보이기도 했다. 유자들은 무슨 연유로 여길 활청담이라고 명명하였을까. 맑은 물이 콸콸거리며 내려가는 모습에서 활청이라고 했다면 연못 같은 형태를 보고 담이라 했을 것이다. 외재는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활청담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활청담의 담潭은 곧 ‘소沼나 못’이다. 담, 소, 못은 모두가 고인 물이고, 갇힌 물이다. 당연히 고요함만 있고 움직임이 없어 썩고 만다. 이처럼 외지고 쓸쓸하고 적막감이 느껴지는 담潭에 굳이 활청이라 한 것은 수면이 아니라 내면에 기인했을 것이다. 담의 물이 청淸하기 위해 물속은 끊임없이 활活해야 한다. 이런 이치를 직시하여 마음의 활청을 찾고자 한 외재의 안목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활청담을 노래한 외재의 시를 주목해보면 그의 청정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겠다.

靜處從看動處情 조용한 곳 좇아 움직임 정취 바라보니

潭心活活水方淸 못 속이 활발하니 그 물 비로소 맑아지네

本來淸活休相溷 본래의 맑고 활발함 흐리게 하지 말게

一理虛明道自生 텅 빈 밝은 이치에서 도는 절로 생기리라

방: 비로소, 바야흐로正在, 이제 막.

휴: 멈추다, 중지하다停也, 말다, 하지말라莫也.

혼: 어지럽다亂也, 섞이다雜也, 흐려지다濁也.

*虛明허명:①텅 비고 밝음 ②마음속이 청허淸虛함.

제4곡 세심대(洗心臺)

명소마다 세심대가 있는 것은 더러 봐왔지만, 암각 된 글씨가 이 처럼 아름다운 세심대는 처음 보았다. 계곡도 아름다웠지만 전서체의 멋스런 글씨에 마음이 빼앗겨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 4곡은 그 이름도 낯익고 뜻도 어렵지 않아 그냥 건너 가려했다. 하지만 마음을 중시한 유자들에게 있어 이 공간은 예사로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쯤에서 세심대를 설정했을까. 아마도 여기가 9곡을 향하는 중간 지점임을 의식했으리라. 이 명징明澄한 계곡물을 보는 순간 우리와 같은 범부도 잡념을 잊고 순백의 마음이 되고 싶은데 하물며 유자들이야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덕지덕지 묻은 마음의 때와 끝없는 욕망을 털어 내어 맑은 영혼이 되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속세의 인간사에서 부귀와 공명, 출세와 장수로 뒤엉킨 탐욕의 실타래는 꼬여있게 마련이다. 갖은 오욕으로 얼룩진 마음을 씻어내야만 궁극의 목표인 9곡을 갈 수 있고, 그 씻음의 통과의례과정이 바로 여기인 것이다.

虛明一理本吾心 청허한 도리가 내 마음의 근본인데

枉被紛囂容染深 공연히 어지러이 얼굴에 깊은 때 묻혀

到得玆臺思一洗 이 대에 올라 한번 씻을 생각하니

肯留滓穢分毫侵 어찌 남은 때를 조금이라도 남기겠나

외재는 맑고 잡된 생각이 없는 마음, 곧 청허한 심성을 마음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때 묻은 속세에서 입은 모든 찌끼를 훌훌 털어내고 한줌의 더러움도 남김없이 씻고서야 극처인 9곡을 갈 수 있었다.

왕: 헛되이, 공연히, 부질없이徒然, 굽다彎曲, 휘어지다, 사특邪曲, 바르지 아니하다, 굽히다屈就.

효: 들렐효喧嘩, 시끄럽다, 떠들썩하다, 방정맞다輕薄, 제멋대로 날뛰다放肆, 만족해하다自得貌.

*紛囂분효: 어지럽고 떠들썩함.

자: 이此也.

*分毫분호: 극히 작은 사물의 비유.

긍: 어찌긍豈也, 어떻게, 동의하다, 願也, 옳다고 여기다, 즐기다.

재: 찌끼沈澱物, 찌꺼기, 앙금, 더러워질재垢也.

예: 거칠예荒蕪, 잡초가 우거지다, 더러워질예汚濁, 더럽힐예玷汚.

*滓穢재예: ①찌기. 오물 ②더럼 힘.

호: 긴털長毛, 가는털細毛.

침: 버릴침背棄, 범할침凌犯.

제5곡 관란담(觀瀾潭)

이름도 특이한 관란담은 큼직한 바위에 횡서로 씌어져 있었고 이끼에 가려져 잘 보이지가 않았다. 이름을 외워보려고 몇 번이나 되뇌어 봐도 혀가 꼬여 잘 돌아가지 않았다. 관란담은 ㄹ 역행동화에 “담”하며 두 입술을 꼭 다무는 양순음이라서 발음이 쉽지가 않았다. 표의문자는 뜻글자답게 의미는 좋게 할 수 있으나 발음이 거북해서 부르기가 힘 드는 경우가 많다. 어찌되었거나 관란담觀瀾潭 이란 ‘물결을 보는 못’으로 이해될 수 있다. 5곡의 이름이 맹자의 진심편의 한 구절인 觀水有術 必觀其瀾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관란’은 물결보다는 여울목에 가깝다고 김문기는 말했다. 그는 문경의 구곡원림(pp.105~106)에서「선유구곡에서 제5곡이 가장 중심이 되는 굽이다.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제5곡은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는 곳으로 수양하는 공간이다. 선인들이 이 공간을 관란담이라고 이름한 것은 의미가 있다. 도의 극처인 제9곡에 이르는 과정에서 원두에서 흘러오는 물결을 바라보며 도의 근원을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외재는 도의 근원을 생각하며 이 시를 노래한 것 같다.

潭上湍流瀉作瀾 못 위 소용돌이물 쏟아지며 이는 물결

到來潭處歲全寬 이 못에 이르러 기세 모두 느릿하고

有本元如是 원래 이와 같이 근본 있는 물결 보며

照得吾心一鑑寒 차가운 수면위로 내 마음 비춰보네

외재는 4곡에서 세심을 하고 5곡에서 잔잔한 물결을 보면서 입수에도 발원지가 있듯이, 도道 또한 그 근원이 있다는 것을 맑은 거울처럼 밝게 반사되는 수면을 통해 깨닫고 있는 듯 보였다.

란: 물결란波也, 큰 물결 란, 큰 파도 란.

여울: ①물살이 세차고 빠른 데. ②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곳, 천탄淺灘.

여울목: 여울물이 턱진 곳.

: 평평한 곳에서 갑자기 조금 높아진 자리.

단: 여울단急流, 급히흐를단疾流, 부딪칠단沖激.

*단류湍流: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물.

관: 느릿할舒緩, 느슨해질 鬆弛, 느긋할舒也.

전: 모두都也, 온통, 전부, 完也, 흠없는옥純玉.

감: 거울鏡也, 비출照也, 살필察也, 光澤.

제6곡 탁청대(濯淸臺)

이 글씨 역시 이끼 속에 묻혀있었다. 김문기는 탁청 이라는 말은 굴원의 ‘어부사’에서 기원한다고 했다. 강남땅으로 유배 온 굴원과 어떤 어부漁夫 와의 대화에서 굴원이 어부를 향해 말하기를 “세상 사람은 모두 더럽혀져 있는데, 나 혼자 올바르고 깨끗하다보니 유배를 왔소.” 말인 즉,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가 부정부패한데, 본인만은 깨끗하고淸, 착하기善 때문에 시기와 질투를 받아서 유배를 왔다.’는 요지로 자기의 청렴함과 충성심을 토로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틀에 갇힌 굴원의 말을 듣고 있던 어부가 세상의 이치를 시로서 답을 하고 있다. 어부는 권력의 횡포에 저항한 굴원의 딱한 사정을 감안하면서도 선과 악, 이 둘을 아우르는 그릇이 되지 못함을 빗대 아래와 같이 읊고 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滄浪之水兮, 내 갓끈을 씻고加以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면滄浪之水濁兮, 내 발을 씻으리라加以濯吾足’ 이 시에서‘탁청’이란 이름이 유래되었고, 탁청濯淸은 말 그대로 ‘세탁하듯 때를 씻어 맑게 한다.’ 이고, 이 시에서 탁영濯纓이란 말 그대로 ‘갓끈을 씻는 것’이지만, ‘때 묻은 세속에서 초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외재는 이점을 시로 읊었다.

臺前流水絲漪橫 누대 앞 흐르는 물에 잔물결 마구 일고

一濯長纓萬累輕 갓끈 한번 씻으니 온갖 근심 홀가분하다

想像損翁當日趣 손옹이 계신 그날의 흥취 생각하니

滄浪一曲玩心明 한 굽이 푸른 물에 더럽힌 마음 밝아지네

여기서 손옹이란 상주출생의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1744~1809)를 말하며, 그는 탁청대 서쪽에 세심정洗心亭을 지어 놓고 초야에 은둔하여 교육에 힘쓴 분이라고 한다.

탁: 때 씻다. 크다, 빛나다.

청: 맑다, 물이 맑다.

의: 물결水文, 바람 불어 생긴波文, 파도가 출렁이는 모양水波動貌.

횡: 자유자재, 가득할充溢, 섞일交錯, 뒤엉길,방자할橫暴, 멋대로 굴다, 제멋대로, 마음대로, 마구.

영: 갓끈官糸, 오라 영, 묶는 끈.

만: 많을衆多만, 각각 다를各異만. 여러 가지, 결단코, 반드시, 절대로.

루: 묶을, 자주, 여러 번, 허물過失, 잘못, 근심 憂患, 걱정거리.

경: 대수롭지 아니할, 홀가분할, 너그럽다.

취: 뜻志冶, 흥취, 멋, 정감, 風致.

완: 더럽힐, 희롱할, 익힐硏習, 감상할, 업신여길, 깔보고 홀대할, 장난감 완.

제7곡 영귀암(詠歸巖)

굽이마다 선계에 들어선 듯 맑은 물과 숲이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마음을 뺏는 것은 부드러워 유연하고, 조화로워 아름다운 전서체로 된 ‘영귀암’ 글자였다. 눈에 익히려 보면 볼수록 수려한 전서체에 마음이 홀려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가는 길손의 길을 막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글씨라니, 글과 글씨의 힘이란 시공을 넘어선다.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는 영귀란 공자의 제자 증석曾晳이 스승의 물음에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공자가 묻기를 “점點아, 너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 이에 대한 대답으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浴乎沂, 무우舞雩서 바람 쐬고風乎舞雩,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고 했다.(*曾點의 字가 증석曾晳이다.)

혼탁하고 암울한 시대를 사는 외재로서 맑은 물빛과 더불어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귀가하는 증석의 삶이 동경의 대상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시에서 기우에서만 아니라 자신이 있는 ‘바로 여기’에서도 이상향을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臨流盡日弄晴暉 온종일 흐르는 물가에서 맑은 풍광 즐기다가

風浴隨時可詠歸 때 맞춰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 오네

不必沂雩能撰志 반드시 기우가 아니라도 뜻을 갖출 수 있으니

巖臺子足振春衣 바위 누대에 흡족하며 세속 먼지 털어보리

청: 갤 청, 비가 그치다, 하늘이 맑다.

휘: 빛 휘, 광채 휘, 빛나다.

우: 기우제우祈雨祭, 춘추필법우, 땅이름우.

찬: 저술著也, 잡을持也, 엮을編定, 建造할 찬

선: 가릴 선擇也, 일선事也, 갖출 선具也.

진: 떨치다, 떨쳐 일어나다, 떨다, 들어 올리다.

*振衣진의: ①옷의 먼지를 턺 ②세속을 벗어나 뜻을 고상하게 함.

제8곡 난생뢰(鸞笙瀨)

드디어 난생뢰다. 언뜻 보니, 글자들이 춤을 추는 듯이 보였다. 생笙자의 대죽竹 부가 눈과 눈썹 모양을 하고선, 어디론가 너울너울 날아갈 것만 같기도 했다. 금세 새긴 각자처럼 또렷하고 선명했다. ‘란’은 봉황의 일종으로 전설상의 영조 이름이고, ‘생’은 생황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소리를 내며 신선의 세계에서 연주된다는 일종의 관악기다. 또한 ‘뢰’는 여울, 급류, 물살이 빠른 곳을 말한다. 이름으로 봐서는 신선 세계에 진입한 것 같기도 하였다. 기이한 이름이 신선과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외재는 그의 시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난생을 연주하는 소리로 여겼으며, 신선의 자취가 엿 보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외재는 신선 세계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琮琤石瀨奏笙鸞 반석 여울 물소리는 생황을 연주하듯

縹渺仙踪底處看 멀고 아득한 신선자취 어디서 찾아보나

從古閬林多怪秘 예로부터 신계에는 신이한 일 많으니

雲間鷄犬是劉安 구름 사이 닭과 개 바로 유안이네

종: 서옥瑞玉 종, 옥으로 만든 祭器.

쟁: 옥소리玉聲 쟁, 옥이 울리는 소리.

*琮琤종쟁: ①옥이나 돌이 부딪쳐 울리는 소리 ②샘물 흐르는 소리.

뢰: 여울뢰沙石上流水, 모래나 돌 위를 흐르는 얕은 여울, 급류뢰湍也단야

단: 여울단, 급히 흐를 단. 부딪칠 단.

생: 악기이름 생, 대자리생竹簧, 대로 짠 깔개.

란: 난새란鸞鳥, 봉황의 일종, 전설상의 영조靈鳥, 방울란鈴也, 군왕의 수레에 다는 방울.

표: 아득할표縹渺, 높고 멀어 아스라한 모양, 나부낄표飛揚, 바람에 흩날리다,옥색비단표, 청백색표.

묘: 멀묘遙遠, 까마득하다, 아득히 멀다, 사라질 묘消逝, 사라져 없어지다, 작을 묘微小, 아주 작다.

종: 발뒤꿈치종 脚後跟(근), 뒤따를종跟隨, 뒤쫓을종追逐, 이을종繼承, 밟을종, 이을종至也,

*縹渺: ①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모야 ②아득히 넓은 모양.

*笙簧생황: 아악雅樂에 쓰이는 관악기의 일종, 笙管생관.

저: 어찌何也, 어떤, 어찌하여, 왜. 밑, 밑바닥.

랑: 솟을 대문랑門高, 높은 모양랑高貌. 신선이 산다는 전설상의 산봉우리 낭풍전의 준말(閬風巓之略稱)

류: 죽일류殺也, 도끼류斧鉞부월, 나뭇잎질류枝葉剝落, 이길류勝也, 돌아다닐류回也, 성류姓也.

*劉安유안: 8곡에서 들려오는 닭과 개의 소리를 유안에 비유한 것은 유안이 신선세계를 노래했던 문인으로 8곡이 극처인 9곡에 가까움을 표현한 것임.

제9곡 옥석대(玉舃臺)

옥석대의 학천정은 후학 교육에 힘쓴 도암 이재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1곡 옥하대에서 거슬러 오면서도 학천정 앞 계곡이 옥석대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학천정으로만 알고 있던 옥석대가 놀라웠고 반가웠다. 오늘처럼 9곡으로 거슬러 올라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연결 된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러면서도 옥석玉舃의 석은 당연히 ‘돌 석石’ 인줄로만 알았는데, 생각과 달리 ‘바닥을 여러 겹으로 붙인 신 석舃’이었다. 갖다 붙여보면 옥석이란 “옥으로 만든 신발”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이름에 걸 맞는 길쭉한 신발 모양의 바위가 놓여 있긴 있었다. 누가 신는 신발일까. 전해져오는 말에 의하면 옥석이란 “득도자가 남긴 유물”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외재 정태진은 그의 시에서 ‘오리’ 이야기를 했다.

全石跨溪鏡面開 계곡에 걸터앉은 옥석에 밝은 수면 열리고

凹爲泉瀑峙爲臺 파인 곳 폭포 되고 우뚝한 곳은 누대라네

仙人遺舃今何在 선인이 남긴 신발 지금 어디에 있는가

應有雙鳧葉顯來 섭현에서 날아온 물오리 두 마리가 있으리라

여기 9곡은 선인이 남긴 자취인 옥석이 있는 곳이고, 이는 득도자가 남겼다는 한 쌍의 옥 신발을 외재가 얻고자 한 것이다. 도의 궁극을 이곳에서 찾은 것이다. 그는 왕교의 고사를 통해 그가 지향하는 도를 형상화하였고 이곳에는 신선의 자취가 남겨져 있으니 이를 얻어야 한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과: 걸터앉다, 걸터타다, 물을 건널과渡也, 넘어설과超過, 차지할과据有, 올라탈과騎也.

치: 우뚝설치屹立, 쌓을치儲備, 언덕치土丘, 멈출치停止, 설치立也.

석: 신석履也, 개펄석干潟地, 주춧돌석柱下石,

신발 바닥을 여러 겹으로 붙인 신.

이: 바닥을 홑 것으로 붙인 신.

석: 개펄석鹹地. (鹹짤 함, 짠맛, 소금기)

부: 물오리 부野鴨.

*鳧舃부석: 신선의 신발. 또는 현령. 후한 때 왕교가 섭땅의 현령이 되어 매월 삭망에 예궐하므로 현종이 거마를 보내지 않고 살펴보게 하였는데, 왕교가 올 무렵에 동남쪽에서 오리 한 쌍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쳐서 잡고 보니 신발 한 짝만 있었다는 고사임. 끝.


* 자료정리 : 손해붕孫海鵬 부회장

≪참고서적≫
김문기, 「聞慶의 九曲園林」, 문경시, 2004.
이해원, 「한자속의 중국문화」, 고려대학교출판부, 2009.